마주보기 리뷰

 

에리히 캐스트너의 시를 알게 되어 넘 기쁘다. 시들을 읽어 나갈수록 감탄하게 된다. 쉽게 읽히면서도 저마다 뭔가 진한 의미를 담고 있고 울림이 있다.

 

시 <레싱>은 자신의 이야기를 하는 것 같은 느낌을 받았다. 에리히 캐스트너는 나치 정권에 저항하면서 결국 자신의 책이 불타는 것을 지켜보아야 했고 나치 독일에 머물면서도 끝내 문학적 양심을 지켰다.

 

<레싱>

그가 쓴 것은 문학 작품이 되었다.

하지만 그는 문학 작품을 쓰기 위해 글을 쓰지 않았다.

목표는 없었다. 그는 방향을 찾았다.

그는 한 남자였을 뿐 천재는 아니었다.

(...)

이후로 그와 필적할 만한 사람은 없었다.

그는 검 한 번 휘두르지 않았지만,

말로써 적을 무너뜨렸다.

그를 이길 수 있는 사람은 없었다.

 

<기차 여행>은 우리 삶의 다양한 모습을 그리고 있다. 잠에 빠진 사람, 불만을 늘어놓는 사람, 끊임없이 떠드는 사람... 엉뚱한 삶의 자리에 앉아 있는 사람도 있다. 하지만 그래도 삶은 계속되고 도중에 안타까운 일도 생긴다. 어린아이도 일찍 삶을 떠나고 슬퍼하는 어머니가 울부짖는다. 기차는 달려가지만 “왜 달려가는지 아무도 모른다.” 그런데 역무원은 누구일까? 삶을 꿰뚫고 있는 신일까? 그래서 그는 우리가 앉아 있는 객실 안을 들여다보며 혼자 미소 짓는 걸까? 쉽게 읽히지만 의미를 유추해보려고 작정하면 끝이 없다. 이러기에 좋은 시라고 평가받는지도 모른다.

 

<기차 여행>

우리는 모두 같은 기차를 타고

시간을 가로질러 여행한다.

이제 창밖을 보는 사람도 있고 이미 볼 만큼 본 사람도 있다.

우리는 모두 같은 기차를 타고 간다.

얼마나 멀리 가는지 아무도 모른다.

잠에 빠진 사람, 불만을 늘어놓는 사람,

끊임없이 떠드는 사람.

역 이름을 알리는 방송이 나온다.

목적지도 없이

세월을 가로질러 달리는 기차.

(...)

우리는 모두 같은 기차를 타고

희망에 부풀어 현재로 여행한다.

이제 창밖을 보는 사람도 있고 이미 볼 만큼 본 사람도 있다.

우리는 모두 같은 기차를 타고 간다.

엉뚱한 객실에 타고 있는 줄도 모른 채.

 

<냉정한 로맨스>는 감정을 절제하며 읊고 있는 사랑시다. 아니, 이별시라고 하는 게 맞다. 구구절절하게 감정 표현을 하지 않고 건조하고 담담하게 노래한다. 절제된 감정 표현이 오히려 더 절실한 울림을 준다.

 

사귄 지 8년이 되었을 때

(하여 서로를 정말 잘 아는 사이라고 말해도 되리라),

그들은 갑자기 사랑을 잃어버렸다.

곁에 있던 지팡이나 모자를 잃어버린 것처럼.

그들은 슬펐지만 애써 밝은 표정을 지었고

아무 일도 없었던 것처럼 키스를 하고

서로를 쳐다볼 뿐, 어찌할 바를 몰랐다.

여자가 끝내 울음을 터뜨렸다. 남자는 그저 옆에 서 있을 뿐.

(...)

두 사람은 근처 자그마한 카페로 들어가

찻잔을 저었다.

저녁이 되어도 그들은 여전히 자리를 지키고 있었다.

텅 빈 카페에 앉아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어쩌다 이렇게 되었는지 도무지 알 수 없었다.

 

<1960년의 스포츠>는 대수롭지 않은 신문보도를 읽는 것 같지만 “더 빠르게”를 외치며 오직 “기록”만을 강조하는 세태를 풍자한다.

 

뤼베커 슈바이츠지의 육상 경기 보도:

“달리기 선수들은 매일 10시간씩 훈련한다.

이들은 100미터를 대략 마이너스 14초의 속력으로 달린다.

선두 그룹은 오늘 아침에 이미 1919년을 넘어 갔다!”

 

읽을수록 새록 의미가 느껴지는 좋은 시집이다. 에리히 캐스트너의 친구의 말에 고개가 끄덕여진다. “그는 과장보다는 오히려 절제를 택했으며, 재주를 부리기보다는 차라리 통속적이고 직설적인 표현을 즐겨 썼다. 그는 울림이 없는 빈말, 알맹이 없는 말의 사치를 경멸했다. 때로는 넋두리처럼 너저분하게 늘어놓은 그의 시어들은 사실상 화학적이라고 할 만큼 잘 정제, 배열되어 있다. 그는 적나라한 솔직함 속에 빛나는 진실을 담았다. 시대를 풍자할 때 그는 서정적 재판관, 역사의 심판관이 되었다.” - 헤르만 케스텐

에리히 캐스트너 <마주보기> 헛된 웃음소리5

에리히 캐스트너 <마주보기> 헛된 웃음소리5

에리히 캐스트너 <마주보기> 헛된 웃음소리4

에리히 캐스트너 <마주보기> 헛된 웃음소리4

에리히 캐스트너 <마주보기> 헛된 웃음소리3

 

에리히 캐스트너 <마주보기> 헛된 웃음소리2 

에리히 캐스트너 <마주보기> 헛된 웃음소리1

 

헛된 웃음소리1

우주의 역사, 최대한 쉽게 설명해 드립니다

연합뉴스: 2021년 7월 27일

▲ 우주의 역사 = 박재용 지음.

인류는 우주 안에서 자신의 존재를 객관적으로 깨달은 유일한 존재다. 그렇다고 인간이 만물의 척도일까? 과학적 사고로 보면 이는 뿌리 깊은 편견이다.

과학저술가인 저자는 우주와 인간의 이야기를 들려주는 이 안내서를 통해 우주의 탄생에서 지구의 탄생, 생명의 탄생과 인류의 이야기를 빅 히스토리로 펼쳐나간다.

우주 빅뱅(대폭발)에서 시작해 별의 일생과 태양계의 역사, 45억 년 전의 지구 탄생, 고생대 탄생과 멸종, 중생대와 신생대, 문명 이전의 인류 역사, 근대와 현대까지 과학사를 파노라마처럼 살펴보는 것이다.

이화북스. 272쪽. 1만5천800원.

 

팬데믹 시대에 다시 마주하는 시집 <마주보기>

 

(서울=연합뉴스) 이승우 기자 = '이상을 품은 사람은/ 그 이상을 실현할 때 조심해야 한다!/ 그렇지 않으면 한순간/ 다른 사람들과 같아진다.'(시 '경고')

1980년대 후반 서정윤 '홀로서기', 도종환 '접시꽃 당신'과 함께 국내 시집 붐을 일으켰던 에리히 케스트너(1899~1974)의 대표 시집 '마주보기'가 완역판으로 다시 나왔다.

이화북스 출판사는 2004년에 다른 출판사에서 처음이자 마지막 정식 계약판으로 출판됐다가 절판된 '마주보기'를 국내 최초 완역판으로 최근 출간했다고 27일 밝혔다. 정상원이 옮겼다. 이화북스 관계자는 "이전 번역판의 오류를 바로잡고 누락된 시와 구절을 새로 옮겨 원본에 충실한 번역을 하고자 노력했다"고 말했다.

'마주보기'는 1988년에 저작권 계약 없이 국내에 처음 출간돼 100만 부 넘게 팔린 밀리언셀러다. 세계 30여 개국에 번역된 걸작 시집이기도 하다.

 

캐스트너가 1936년 발표한 이 시집의 원제는 '에리히 캐스트너 박사가 시로 쓴 가정상비약'이다. 삶에 지치거나 감정이 메마를 때, 사랑이 떠나갈 때, 결혼 생활이 위기에 빠질 때, 나이 드는 게 슬플 때 등 여러 상황과 감정에 맞춘 처방전 같은 시들을 선사한다.

억눌리고 우울한 코로나 팬데믹 시대에 걸맞은 시집인 셈이다. 시인 캐스트너 역시 문학은 동시대의 아픔을 담아 가장 쉬운 말로 재미와 감동을 줄 수 있어야 한다는 문학관을 바탕으로 이 시집을 썼다고 한다.

캐스트너의 시는 대중적 인기도 높았을 뿐 아니라 당대 문인들로부터 호평을 받았다. 헤르만 헤세는 그에 대해 "동시대를 이야기하지만, 어느 시대나 통하는 작가"라고 했다. 독일 공로십자훈장, 안데르센 문학상, 게오르크 뷔히너 문학상 등을 받았고 독일펜클럽 회장을 지냈다. 나치 정권하에서 탄압받았으나 정부 여당에 타협하는 대신 문학적 양심을 지킨 것은 현재 우리 문인들에게 시사하는 바가 있다.

leslie@yna.co.kr

마주보기 - 에리히 캐스트너 시집

마주보기

마주보기 <경고>

마주보기 - 에리히

마주보기 - 에리히 캐스트너 시집

덫에 걸린 쥐에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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누구나 아는 슬픔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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누구나 아는 슬픔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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냉정한 로맨스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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냉정한 로맨스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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냉정한 로맨스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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냉정한 로맨스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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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차여행4

기차여행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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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차여행2

기차여행2

기차여행1

 

에리히 캐스트너, <기차여행> 1

에리히 캐스트너

 

에리히 캐스트너(1899~1974)는 독일 바이마르 공화국 후반기인 1928년 첫 시집 『허리 위의 심장Herz auf Taille』을 발표해 선풍적인 인기를 끌었고 1929년 『거울 속의 소란Lärm im Spiegel』, 1930년 『한 남자가 털어 놓는다Ein Mann gibt Auskunft』, 1932년 『어느 편에도 속하지 않는 노래Gesang zwischen den Stühlen』를 계속해서 발표했다. 이 시집들은 “캐스트너가 등장한 이후 사람들이 다시 시를 읽기 시작했다”는 말이 생길 정도로 폭발적인 반응을 얻었다.

 

『에리히 캐스트너 박사가 시로 쓴 가정상비약Doktor Erich Kästners Lyrische Hausapotheke』은 이미 출간된 시집에서 대표시들을 뽑고 새롭게 쓴 시들을 추가해 펴낸 시집이다. 에리히 캐스트너는 히틀러가 정권을 잡은 이후 독일에서 출판활동이 금지되어 스위스에서 이 시집을 출간했다. 이 시집은 바르샤바 게토에서 유대인들이 손으로 직접 써서 돌려가며 읽었다. 유대인들에게 절망적인 상황 속에서도 위안과 용기를 준 당시의 필사본 중 하나가 지금도 폴란드 국립박물관에 전시되어 있다. 오늘날까지도 독일에서 스테디셀러로 꾸준히 독일 국민들의 사랑을 받고 있다.

 

우리나라에서는 1988년에 저작권 계약 없이 처음 출간되어 100만 부 이상 판매되었고 이후 정식 계약판으로 2004년에 다시 출간된 적이 있다. 

 

에리히 캐스트너는 독일 드레스덴에서 피혁수공업자인 아버지와 집안에서 부업을 하며 생계를 도운 어머니 사이에서 태어났다. 어머니는 미장원을 개업해 아들의 학업을 도왔고 아들이 성인이 되었을 때까지도 우편으로 옷을 받아 세탁해 다시 보낼 정도로 아들 사랑이 각별했다. 

 

에리히 캐스트너는 교사가 되고자 사범학교에 진학했다가 제1차 세계대전에 징집되었다. 그는 사범학교의 억압적인 교육방식으로 인해 교사의 꿈을 접게 되고 교육 제도 전반에 대해 비판적인 시각을 갖게 되었다. 이때의 교육방식에 대해 에리히 캐스트너는 “국가는 최고의 효율성을 추구하는 교육 정책을 펼쳤다. 연금을 보장해주는 대가로 맹목적으로 복종하는 소시민적 공무원을 양성했고 ... 우리 교육은 하사관학교에서처럼 진행되어 학교가 병영과도 같았다”고 말한 바 있다. 그는 이런 분위기를 견디지 못해 무단결석한 적도 있었고 “모범생”이었던 것을 후회하기도 했다. 

 

제1차 세계대전의 참전은 에리히 캐스트너에게 군국주의에 대한 환멸을 심어주었고 혹독한 군사훈련으로 심장병을 얻게 되어 평생 정기적으로 요양병원에서 치료를 받아야 했다. 특히 폭군처럼 지휘했던 상관 바우리히 중사에 대해서는 다음과 같은 시로 비판하고 있다.

 

<바우리히 중사>

 

12년 전

그는 우리의 중사였다.

그에게서 우리는 “받들어 총!”을 배웠다.

한 병사가 넘어지면 그는 비웃으며

모래 위에 쓰러진 병사에게 침을 뱉었다.

 

“무릎 꿇어!”가 그가 가장 좋아한 말이었다.

이백 번도 더 외쳤다.

그럴 때면 우리는 황량한 연병장에서 서 있다가

골리앗처럼 무릎을 꿇고

증오를 배웠다.

 

기어가는 병사를 보면

상의를 낚아채고는

“이 얼어 죽을 놈!”이라고 으르렁거렸다.

그렇게 시간은 흘렀고

우리는 청춘을 값싸게 팔아 넘겼다.....

 

그는 재미삼아 나를 모래밭 속을 뒹굴게 했고

뒤에서 지켜보며 물었다:

“내 권총을 손에 쥔다면 -

당장 나를 쏘아 죽이고 싶겠지?”

나는 “예!”라고 말했다.

 

그를 아는 사람은 결코 그를 잊지 못할 것이다.

우리는 그를 마음에 새기고 있다!

그는 짐승이었다. 침을 뱉고 소리를 질러댔다.

바우리히 중사는 짐승으로 불렸다.

우리 모두는 왜 그런지 안다.

 

그는 내 심장을 망가뜨렸다.

나는 결코 용서하지 않을 것이다.

지금도 심장이 쑤시듯이 아프고 두근두근 거린다.

잠들기 전 무서운 생각이 들 때면

그가 떠오른다.

 

이상이 「바우리히 중사」라는 시의 전문이다. 굳이 이 시를 소개한 이유는 이전 번역판의 문제점 때문이다. 이전 번역판에서는 마지막 연에서 원문에는 없는 다음과 같은 행을 덧붙였다. ‘참호 속으로 날아 들어온 수류탄을 / 몸으로 덮어 우리를 살리고 / 그는 산산히 부셔졌습니다.’ 에리히 캐스트너에게는 악몽이었던 바우리히 중사를 영웅으로 둔갑시켜 놓은 것이다. 아직도 소셜미디어에서는 이 마지막 구절을 언급하며 엉터리 “감동”을 이야기하는 경우가 있다. 이제 이런 부끄러운 일이 더 이상 반복되지 않기를 바란다.

 

에리히 캐스트너는 제1차 세계대전이 끝난 후 라이프치히대학교에서 독문학을 전공해 박사학위를 받았다. 박사과정 중에 신문사 기자가 되었고 여러 일간지와 잡지에 시를 발표했다. 1927년 베를린으로 옮겨 본격적인 저술활동을 하기 시작했다. 당시 베를린은 용광로와 같은 도시였다. 어려웠던 독일 경제가 다소 안정되면서 베를린은 “황금의 20년대”를 맞아 유럽의 문화 중심지가 되었다. 연극 극장과 영화관이 폭발적으로 늘어났고 라디오가 대량 보급되고 신문과 잡지가 비약적으로 늘어남으로써 대중문화가 꽃피어났다.

 

하지만 1929년 미국 대공황의 여파로 독일 경제는 또 다시 위기를 겪는다. 실업자가 400만 명이 넘어서고 극우파인 히틀러의 나치당과 극좌파인 공산당 사이에 무력 충돌이 빈번하게 벌어질 정도로 극심한 혼란기가 도래했다. 이 시기에 에리히 캐스트너는 풍자소설 『파비안 - 어느 모럴리스트의 이야기』(1931) 와 아동소설 『에밀과 탐정들』(1929), 『핑크트헨과 안톤』(1931), 『하늘을 나는 교실』(1933) 등을 발표해 베스트셀러 작가로서 우뚝 서게 되었다. 에리히 캐스트너가 이렇게 아동문학에 집중했던 이유는 투쟁구호만 난무하고 미래를 위한 대안을 찾기 어려웠던 당시 상황에서 “어린 시절의 소중한 가치들을 질식시키지 않는다면 인류가 더 나은 방향으로 변화될 수 있을 것이라는 희망”을 품었기 때문인 것으로 짐작된다. (클라우스 코르돈, 『망가진 시대』, 131) 이런 염원에 화답하듯 현재 독일 전역에서 115개 이상의 학교가 에리히 캐스트너의 이름을 학교명으로 내걸고 있다.

 

1933년 히틀러가 정권을 장악하게 되면서 에리히 캐스트너는 “블랙리스트”에 올라 집필금지를 당하고 그해 5월 10일에는 자신의 책이 불태워지는 걸 직접 지켜봐야 했다. 이렇게 나치가 책을 불태울 정도로 에리히 캐스트너는 자유와 평화를 노래하며 사회의 불의를 비판했다. 친구였던 작가 헤르만 케스텐의 다음과 같은 말에서도 에리히 캐스트너의 진면목이 드러난다.

 

“우리는 둘 다 급진적이긴 했으나 마르크스주의자는 아니었다. 우리는 어떤 정치적인 당파에도 가입하지 않았지만 정치적으로 그리고 문학적으로 정의와 자유의 편에 서서 모든 사회적인 억압, 군국주의, 쇼비니즘, 비인간성에 맞서 싸웠다.” (클라우스 코르돈, 『망가진 시대』, 102)

 

신즉물주의

에리히 캐스트너는 흔히 신즉물주의를 대표하는 작가로 꼽힌다. 신즉물주의는 1920년대 후반 독일에서 일어난 예술 운동으로 감정 표현을 억제하고 냉정한 관찰과 사실적이고 정확한 묘사를 강조했다. 에리히 캐스트너의 시에서도 친숙한 일상어 구사나 주변에서 접할 수 있는 대상을 건조하고 냉정하게 묘사하는 경향이 두드러진다. 이는 결국 문학이란 동시대의 아픔을 담을 수 있어야 하며, 가장 쉬운 말로 재미와 감동을 줄 수 있어야 한다는 소신으로 이어졌다.

이런 경향이 잘 나타나는 시가 바로 이 시집에 수록된 「냉정한 로맨스」이다. 이 시는 독일의 중, 고등학교 교과서에 실려 국민시로 애송되고 있다.

 

사귄 지 8년이 되었을 때

(하여 서로를 정말 잘 아는 사이라고 말해도 되리라),

그들은 갑자기 사랑을 잃어버렸다.

곁에 있던 지팡이나 모자를 잃어버린 것처럼.

 

그들은 슬펐지만 애써 밝은 표정을 지었고

아무 일도 없었던 것처럼 키스를 하고

서로를 쳐다볼 뿐, 어찌할 바를 몰랐다.

여자가 끝내 울음을 터뜨렸다. 남자는 그저 옆에 서 있을 뿐.

 

창문 너머로 지나가는 배에 손짓하는 사람이 있었다.

벌써 4시 15분,

커피 마시러 갈 시간이 되었다고 남자는 말했다.

옆방에서는 누군가 피아노 연습을 하고 있었다.

 

두 사람은 근처 자그마한 카페로 들어가

찻잔을 저었다.

저녁이 되어도 그들은 여전히 자리를 지키고 있었다.

텅 빈 카페에 앉아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어쩌다 이렇게 되었는지 도무지 알 수 없었다.

 

이 시는 에리히 캐스트너가 직접 경험했던 사랑과 이별의 슬픔을 담담하게 이야기한다. 절제된 감정 표현이 오히려 더 절실한 울림을 준다. 거의 100년이 되었지만 지금도 바로 감정이입이 가능하다. 이 시의 모델이 된 연인 일제 율리우스Ilse Julius는 평생 독신으로 지냈다고 한다.

 

에리히 캐스트너의 시 중에서 역설paradox을 담은 아포리즘은 매우 평이한 비유와 상징으로 반어적 위트를 이야기하며 읽는 이의 삶을 되돌아보게 만든다. 이 시집의 맨 앞에 등장하는 「덫에 걸린 쥐에게」와 마찬가지로 「도덕」도 곱씹을수록 묘미가 되살아난다.

 

선은 없다,

예외는 있다: 우리가 선을 행할 수는 있다!

 

이 시는 독일어 원문이 2행으로 구성되어, 각 행이 네 단어로 각운(Gutes/es)을 이루고 있다. 원문은 다음과 같다.

Es gibt nichts Gutes,

außer: Man tut es.

 

첫 행은 우리가 경험적으로 아는 세상에 대해 ‘선은 없다’고 규정을 내린다. 두 번째 행에서는 이러한 규정이 너무 부정적이고 잔인하다고 느끼기라도 한 것처럼 ‘그래도 선은 존재할 수 있다’는 의미의 예외를 설정한다. 하지만 이 두 번째 행은 첫 행과는 달리 그 자체로 진리라고 말할 수 없고 실행될 때야 비로소 참이 된다. 다시 말해 우리가 저자의 요청을 이행할 때 참이 되는 것이다. 이렇게 해서 두 행이 역설을 말하지만 서로 모순되지 않는 효과를 발휘한다. 독일의 저명한 정치학자이자 언론인 돌프 슈테른베르거는 이 시를 “작은 걸작Meisterwerkchen”이라고 극찬하며 철학자 이마누엘 칸트의 경지로 끌어올린다. 칸트는 『실천이성비판』 서문에서 자신의 책은 순수실천이성이 있다는 것만을 밝히고, “이성이 순수이성으로서 실제로 실천적이라면 자기의 실재성을 ... 행위를 통해 증명하고, 그런 가능성에 반대되는 일체의 궤변은 헛된 것이다”라고 말한 바 있다. 돌프 슈테른베르거는 이 구절을 인용하면서 칸트와 캐스트너의 역설은 동일하다고 주장한다. “이성이 있다는 것은 오직 행위를 통해서만이 증명된다. 이성은 하나의 사실이나 존재 또는 본질로서는 세상에 존재할 수 없다. ‘예외는 우리가 선을 행할 수는 있다’는 것이다.” (참고: Dolf Sternberger, Die praktische Vernunft in einer Nuß, in: Frankfurter Anthologie. Bd. 7. Frankfurt am Main, S. 199~202)

 

좌파 멜랑콜리

에리히 캐스트너는 학계와 일반 독자의 평가가 극명하게 엇갈리는 작가였다. 그가 쓴 시와 소설 그리고 아동소설들은 전 세계 30여 개국에서 번역되고 영화화되거나 연극 무대에 올려져 독일은 물론이고 전 세계인들의 사랑을 받고 있지만, 독일 학계의 평가는 인색했다. 이런 평가에는 발터 벤야민이 1931년에 발표한 서평이 큰 역할을 했다. “좌파 멜랑콜리 - 에리히 캐스트너의 새 시집에 대하여”라는 제목의 이 서평에서 벤야민은 캐스트너에 대해 “불만에 차 있고 우울하며” “판에 박힌 우울증”을 토로하고 “몰락하는 시민계급으로서 프롤레타리아 계급을 모방한다”고 진단한다. 나아가 “정치적으로는 정당이 아니라 패거리를, 문학적으로는 유파가 아니라 유행을, 경제적으로는 생산자가 아니라 중개인을 만드는 데” 기여하고, 혁명을 외면하고 “오락과 유흥”에 탐닉하고 있다고 비판한다. 캐스트너가 표방하는 “이러한 좌파 급진주의는 엄밀하게 말해 그 어떤 정치적 행동”도 할 수 없다고 말하면서 2천 년 동안 변신해온 멜랑콜리의 마지막 모습이라고 결론을 내린다. 우리는 이러한 서평을 읽으면 이 서평을 쓴 사람이 발터 벤야민, 탁월한 문화비평가이자 문학이론가였던 바로 그 발터 벤야민이 맞는지 의심하게 된다. 이 서평에서는 문학이 정치와 계급투쟁의 도구로 전락해 있다. 그리고 정작 캐스트너 시집에 대한 서평임에도 시에 대한 분석은 찾아볼 수 없다. 또 좌파와 우파의 극한 대립이 팽배했던 당시 상황에서 우파가 아니라 오히려 연대해야 할 캐스트너와 같은 좌파 진영의 인물에 대해 이데올로기 공격을 했다는 것도 이해하기 어렵다. 벤야민은 “멜랑콜리”에 대해서 “나태함과 둔감함”의 성향이 있지만 “다른 한편으로 지성과 명상의 힘”이 있다고 말한 적이 있다. (『독일비애극의 원천』, 224) 이 책에 실린 캐스트너의 시를 읽은 독자라면 벤야민이 말한 멜랑콜리의 긍정적인 요소인 “지성과 명상의 힘”을 어렵지 않게 확인할 수 있을 것이다.

 

더더욱 놀라운 것은 이러한 벤야민의 비판이 벤야민과 유사한 입장을 견지하는 좌파 성향의 학계 인사들에 의해 답습되었다는 사실이다. 현실 사회주의가 몰락한 이후에야 비로소 이러한 편향되고 왜곡된 평가가 수정되고 있는 것은 그나마 다행한 일이다. 1999년 캐스트너의 탄생 100주년을 맞이해 새롭게 출간된 전집과 영화 제작 및 상영, 언론의 집중 조명 그리고 다양한 기념행사로 ‘캐스트너 르네상스’라는 말이 나온 것도 이러한 재평가 작업의 일부로 볼 수 있다.

 

나치가 지배한 독일에서 대부분의 좌파 성향의 작가들은 외국으로 망명했지만, 에리히 캐스트너는 독일에 머물렀다. 독일에 남아 한편으로는 어머님을 보살피고자 했고 또 다른 한편으로는 시대의 목격자로서 대하소설을 쓰고자 했지만 뜻을 이루지는 못했다.

 

제2차 세계대전이 끝난 후 에리히 캐스트너는 1949년 독일 펜클럽 회장으로 선출되었고, 1956년 뮌헨시 문학상을, 1957년 게오르크 뷔히너 문학상을 수상했으며, 1960년에는 안데르센 문학상을 수상했다. 노년에 이르러서도 자유와 평화를 위해 목소리를 높였고, 반전 및 반핵운동을 펼치다가 1974년 세상을 떠났다.

 

참고 문헌

발터 벤야민 지음, 김유동 ․ 최성만 옮김, 『독일 비애극의 원천』, 한길사, 2009

발터 벤야민 지음, 윤미애 ․ 최성만 옮김, 『브레히트와 유물론』(발터 벤야민 선집8), 도서출판 길, 2020 (이 책에 벤야민의 서평 「좌파 멜랑콜리 - 에리히 캐스트너의 새 시집에 대하여」가 수록되어 있다.)

탁선미, 대중매체와 대중적 작가 - 에리히 캐스트너와 그의 문학, 독일문학 제87집(2003), 169~191

박홍규 지음, 『에리히 캐스트너 평전 - 삶을 사랑하고 죽음을 생각하라』, 필맥, 2004

클라우스 코르돈 지음, 배기정 옮김, 『망가진 시대』, 시와진실, 2004

최성일 지음, 『책으로 만나는 사상가들』, 한국출판마케팅연구소, 2011

에리히 캐스트너의 시 7

 

대포가 꽃피는 나라를 아시나요?

 

대포가 꽃피는 나라를 아시나요?

모른다고요? 곧 알게 될 겁니다!

그곳에는 병영 같은 사무실에서

거만하고 당당한 표정을 한 지배인들이 버티고 서 있습니다.

 

그곳에서는 사람들이 넥타이 밑에 상병들이 다는 단추를 붙이고 다닙니다.

그곳 사람들은 모자를 쓰고선 철모를 썼다고 생각합니다.

그곳 사람들은 얼굴은 있지만, 머리는 없습니다.

잠자리에 드는 사람들은 더 많은 병사를 번식합니다.

 

그곳에서는 상관이 무언가를 원하면

― 무언가를 원하는 것이 바로 그의 직업입니다 -,

먼저 사람들의 판단력이 굳어지고 그다음에는 아예 멈춥니다.

우로 봐! 누워서 굴러!

 

그곳에서는 아이들이 작은 박차를 달고

가르마를 탄 상태로 태어납니다.

그곳에서는 민간인으로 태어나지 않습니다.

그곳에서는 주둥이를 닥치는 자만이 승진합니다.

 

그 나라를 아시나요? 행복한 곳일 수도 있습니다.

그 나라는 행복한 곳일 수도 있고 사람들을 행복하게 해 줄 수도 있습니다!

그곳에는 논과 밭, 석탄, 철, 돌이 있고

근면과 힘 그리고 다른 멋진 것들이 있습니다.

 

그곳에는 가끔 맑은 정신과 선량한 마음을 가진 사람들도 있습니다!

그리고 참된 영웅도 있지요. 아주 드물지만 말입니다.

그곳에서 두 남자 중 하나는 아이와 같은 마음을 가지고 있습니다.

그 아이는 납으로 만든 장난감 병정을 가지고 놀지요.

 

그곳에서는 자유가 자라지 않습니다. 자유는 설익은 채 남아 있습니다.

사람들이 짓는 건 언제나 병영이 됩니다.

대포가 꽃피는 나라를 아시나요?

모른다고요? 곧 알게 될 겁니다!

에리히 캐스트너의 시 6

 

인내심을 가질 것!

 

대부분의 사람들이 영위하는 삶에서

드러나는 사실은 ― 결국 사람들은 이 사실을 분명히 깨닫게 된다 ―

사람은 열려 있는 문에도

머리를 부딪칠 수 있다는 것이다!

에리히 캐스트너의 시 5

 

인류의 진화

 

한때 놈들은 털북숭이 몸으로 사나운 얼굴을 하고

나무 위에 웅크리고 있었다.

그러다가 원시림에서 나와

땅을 아스팔트로 바꾸고

집을 30층까지 쌓아 올렸다.

 

그들은 중앙난방이 되는 방에서

벼룩을 피하고 있다.

이제 전화도 이용한다.

나무 위에 있을 때와

똑같은 태도를 취한다.

 

그들은 멀리서 울리는 소리를 듣고 멀리 본다.

그들은 우주와 접촉한다.

이를 닦고 현대식으로 호흡한다.

지구는 수세식 설비가 된

교양 있는 별이 되었다.

 

그들은 우편물을 관을 통해 보낸다.

그들은 미생물을 쫓고 배양한다.

그들은 자연에 모든 편의를 제공한다.

그들은 하늘로 높이 날아올라

2주 동안이나 머문다.

 

그들은 소화시키고 남은 것은

솜으로 가공한다.

원자도 쪼개고 근친상간도 치료한다.

그들은 문체를 연구해

카이사르가 평발이었다는 사실도 증명한다.

 

이렇게 그들은 머리와 입으로

진화했다.

하지만 이를 제외하면

그리고 자세히 들여다보면

그들은 여전히 이전의 털북숭이 원숭이 그대로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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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리히 캐스트너의 시 4

 

인류의 진화

 

한때 놈들은 털북숭이 몸으로 사나운 얼굴을 하고

나무 위에 웅크리고 있었다.

그러다가 원시림에서 나와

땅을 아스팔트로 바꾸고

집을 30층까지 쌓아 올렸다.

 

그들은 중앙난방이 되는 방에서

벼룩을 피하고 있다.

이제 전화도 이용한다.

나무 위에 있을 때와

똑같은 태도를 취한다.

 

그들은 멀리서 울리는 소리를 듣고 멀리 본다.

그들은 우주와 접촉한다.

이를 닦고 현대식으로 호흡한다.

지구는 수세식 설비가 된

교양 있는 별이 되었다.

 

그들은 우편물을 관을 통해 보낸다.

그들은 미생물을 쫓고 배양한다.

그들은 자연에 모든 편의를 제공한다.

그들은 하늘로 높이 날아올라

2주 동안이나 머문다.

 

그들은 소화시키고 남은 것은

솜으로 가공한다.

원자도 쪼개고 근친상간도 치료한다.

그들은 문체를 연구해

카이사르가 평발이었다는 사실도 증명한다.

 

이렇게 그들은 머리와 입으로

진화했다.

하지만 이를 제외하면

그리고 자세히 들여다보면

그들은 여전히 이전의 털북숭이 원숭이 그대로이다.

비스마르크 2

 

비스마르크와 라살의 역사

 

1. 비스마르크

 

1848년 전후에 보수적인 정치가에 불과하였던 비스마르크는 러시아 주재대사(1859), 프랑스 주재대사(1862)가 되면서 안목을 넓혔고, 1862년 국왕 빌헬름 1세가 군비 확장 문제로 의회와 충돌하던 시기에 프로이센 총리로 임명되었다. 그는 취임 첫 연설에서 “현재의 큰 문제는 언론이나 다수결에 의해서가 아니라 철과 피에 의해서 결정된다”라고 선언하며 이른바 ‘철혈정책’의 의지를 밝혔다.

 

비스마르크는 그가 사랑하는 세계를 구하려 했다. 라살과 처음 만났을 때도 같은 마음을 가슴에 품고 있었다. 그가 사랑하는 세계란 군대와 귀족과 왕이 지배하는 프로이센의 신분 사회였다. 이는 영지와 사냥과 마차의 세계, 수 세대에 걸쳐 굳어진 높은 신분과 비천한 신분의 세계였다. 철강 콘체른의 굴뚝, 거대한 공장, 철로가 이미 오래전에 숨 막히는 속도로 모든 옛것을 뒤덮었다. 혁명적인 경제 발전으로 확장해 나가는 도시들, 점차 목소리를 높이는 시민계급 그리고 점점 더 자신들의 권리를 주장하기 시작한 노동계급은 비스마르크가 성장해 온 평온한 프로이센을 위협했다. 정치 일선에서 비스마르크가 실제로 맞서 싸워야 할 적은 자유주의자들이었다.

 

비스마르크는 실패한 1848/49년 혁명의 잔해 위에서 활동했다. 그런 상황에서 프로이센은 조각조각 갈라져 있던 독일의 가장 큰 세력으로 부상했다. 이렇게 갈라진 독일이 어디로 갈 것인지, 통일을 이룬다면 어떤 형태의 국가가 될 것인지를 아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민주적 국가 형태로의 독일 통일은 일단 좌절되었으나 그 이념의 불씨는 살아 있었다. 이념의 수호자로 남은 자유주의자들과 자유주의가 비스마르크는 너무나 역겨웠다. 그에게 자유주의는 시민계급이 쓸데없는 말과 알 수 없는 음모로 권력을 탈취하려는 음흉한 이념에 지나지 않았다. 비스마르크는 자유주의자들이 말하는 자유에서 사회적 기회를 찾을 수 없었고 그저 제멋대로의 자의성만 보았다.

 

비스마르크에게는 국가와 사회에 대한 분명한 구상이 있었다. 그가 구상한 사회에서는 누구에게나 역할이 있고 그 역할을 저버리면 안 된다. 그러나 자유주의자들은 정태적인 것이 아닌 역동적인 사회를 원했다. 누구에게나 평등한 기회가 주어지고 누구나 말하고 참여할 권리가 있으며 스스로 변화할 수 있는 그런 사회 말이다. 자유주의자들이 추구하는 국가에서 갈등은 찬반 토론을 통한 합의를 거쳐 해결되었다. 자유주의 사회는 무한히 변화 가능한 토대 위에서 자신을 문제 삼도록 의도적으로 구상된 것이었다.

 

비스마르크는 이를 알지 못했다. 그의 눈에는 자유를 위한 자유주의자들의 변론은 목표가 없어 보였다. 그는 자유주의의 옹호자들을 모두 원칙이 없는 자들로 여겼다. 비스마르크는 자유주의가 매우 분명한 원칙들을 표방하고 있음을 보지 못했다. 자유주의는 공정하게 최선의 이념을 위해 싸우는 사회를 원했다. 그러기 위해 국가는 규칙을 세우고 그것이 지켜지도록 살펴야 한다. 그러나 권력 지향적 인간 비스마르크는 원칙이 없는 사람이었다. 그는 언젠가 이렇게 말했다. “우리가 원칙을 확고히 지키는 것은 원칙이 시험대에 오르지 않는 한에서다. 그런데 그런 일이 일어나면 우리는 원칙을 버린다.”

비스마르크는 마키아벨리의 국가철학 정신 속에서 살았다. 취임 후 연설에서 그는 자신의 시각을 분명히 했다. “독일은 프로이센의 자유주의가 아니라 그 힘을 본다. 시대의 커다란 문제는 연설이나 다수결의 원칙을 통해 결정되는 것이 아니라 철과 피로 결정된다. 이를 간과한 것이 1848/49년의 큰 실수였다.” 연설은 훗날 일어나게 될 일은 앞당겨 말한 셈이 되었다. 전쟁조차도 목적을 위한 수단이었다.

 

그 목적, 즉 프로이센 왕국은 비스마르크에게는 모든 수단을 정당화다. 반면 자유는 그에게 목적이 아니었다. 자유는 국가 질서를 좀먹을 뿐이었다. 자유주의를 혐오하는 비스마르크는 역설적이게도 자신과 대척점에 있는 라살과 뜻을 같이한다. 물론 라살은 비스마르크와는 다른 사회를 원했다. 그러나 국가는 어떤 부동의 건축물이어야 한다는 생각이 두 사람을 하나로 묶었다. 그들의 생각과 같은 국가라면 바꿀 필요도 개조할 필요도 없는 것이었다.

 

 

2. 라살

 

비스마르크보다 열 살 아래인 라살은 이미 오래전부터 서서히 태동하기 시작한 노동운동의 대변자였다. 그는 부유한 유대인 비단 중계상의 아들로 매우 지적이고 열정적이었으며 명예에 집착했다. 짙은 갈색의 헝클어진 머리가 길쭉하고 단호한 얼굴을 사자 갈기처럼 휘감고 있는 듯한 인상의 라살은 고향 브레슬라우Breslau에서 철학을 공부했고 헤겔에 열광하기 시작했다. 일찍이 지식인들 사이에 이름을 알린 그는 당대 거물 중에서도 알아보는 사람이 생길 정도였다. 알렉산더 폰 훔볼트는 라살을 ‘신동’이라고 했고, 파리에서 만난 시인 하인리히 하이네Heinrich Heine는 ‘폭넓은 지식과 최고의 통찰력을 지닌’ 지성인이자 실천가라고 평했다. 그렇지만 하이네는 라살이 매우 이기적이고 수단 방법을 가리지 않는 사람이라는 것도 눈치챘다.

 

라살은 하이네의 추천서로 베를린 살롱에 들어갈 수 있었다. 여기서 당시 스물한 살이었던 그는 하츠펠트Hatzfeldt 백작 부인을 만난다. 그녀는 불행한 정략결혼에서 벗어나려 변호사를 찾고 있었고 라살이 적임자라고 생각했다. 그는 백작 부인이 사는 뒤셀도르프로 이사해 법학을 공부하기 시작했고 9년의 법적 소송 끝에 그녀의 족쇄를 풀어 주었다. 라살은 감사의 답례로 평생 연금을 보장받았다.

 

약자들의 변호인이라는 명성을 얻게 된 라살은 약자들의 이해를 위해 싸웠다. 이때부터 그는 지도자를 꿈꿨다. 라살은 1848년 혁명 중에 민중을 무장투장에 선동해 여러 번 체포되었다. 그는 혁명 당시 독일에 남은 몇 안 되는 자도자급 혁명가 중 한 사람이었는데 법정에 소환되어 금고형을 받을 위험도 감수했다.

 

비스마르크가 베를린에서 부르주아 자유주의자들과 싸움을 시작하는 동안 런던에서는 이미 오래전에 마르크스와 엥겔스가 성장하는 노동자계급에게 도래할 천국을 설파하는 선구적 사상가로 활동하고 있었다. 라살은 그들의 저작을 탐독했고 그들과 만났다. 라살은 그들의 희망에 찬 예언에 만족하지 않았다. 그는 마르크스와 엥겔스가 제시한 세계를 앞당기려 했다. 그는 런던에 두 번 갔지만 마르크스와 의견의 일치를 볼 수 없었다. 함께 혁명을 이룰 수는 없었지만 마르크스는 라살의 이른 죽음을 막은 사람이다. 1858년 주먹질한 상대에게 결투를 신청한 라살을 말린 것이다.

 

라살은 독자적인 길을 가기로 결심한다. 그것이 그와 어울리는 길이기도 했다. 1862년 4월 중순 베를린 노동자들 앞에서 한 연설에서 라살은 노동자정당의 창당을 요구했다. 그는 군주제와 프로이센은 건드리고 싶지 않았다. 라살이 생각하는 사회주의 사회는 기존의 권력 지형 안으로 편입하는 것이었다. 파업을 거부했고 임금은 의회에서 정하고자 했다. 이상적인 국가에 관한 구상에서 라살은 ‘프롤레타리아트 독재’를 거쳐 탄생하는 완전히 새로운 사회를 꿈꾸었던 마르크스와 엥겔스의 이념과 분명하게 결별했다. 그가 자신의 구상을 피력한 《노동자 강령Arbeiterprogramm(1862)라이프치히 노동자들에게 특히 깊은 인상을 남겨 새롭게 정립할 노동운동의 지도자가 되어 달라는 요청을 받는다. 라살은 1863년 5월 1일에 이 요청에 응답했다. 〈라이프치히에서 전 독일 노동자대회를 개최하는 중앙위원회에 보내는 공개 답변서〉에서 그는 다시 한번 자신의 구상을 밝혔다. 여기에서 그는 보통선거와 평등선거를 위한 투쟁과 국가가 지원하는 생산협동조합의 창설을 주요 목표로 세웠다.

 

라살의 부상을 주의 깊게 관찰했던 비스마르크는 그를 관저로 초청한다. 비스마르크는 이 초청의 명분을 ‘노동계급의 상황에 대한 자문을 듣기 위해서라고 했다. 그러나 그건 핑계에 불과했다. 무엇보다도 비스마르크는 자유주의에 대항하기 위해 어떻게 라살을 자신의 편으로 끌어들일 수 있을지 알아보려 했다. 창립 준비 중인 1863년 5월 12일 혹은 13일에 비스마르크와의 첫 만남이 성사되자 라살은 자신이 곧 대중운동의 선봉에 서게 되리라고 확신했다. 그는 비스마르크의 초청에 우쭐해졌고 일종의 대등한 지위를 확보한 것 같아 기분 좋아했다. 그래서 라살은 비스마르크와의 대화에서 최선의 독일 국가에 관한 자신의 구상을 스스럼없이 밝혔다.

 

라살은 채 두 주도 지나지 않아 라이프치히에서 열린 전 독일 노동자 연맹ADAV(훗날 사민당SPD의 모태가 된 조직) 창립 대회에서 의장으로 선출되자 서둘러 비스마르크에게 강령을 보냈다. 라살은 동봉한 편지에서 농담으로 이 강령을 ‘내 제국의 헌법’이라고 불렀다. 게다가 억지로 꾸민 말로 노동자계급은 “공화주의적인 사상에도 불구하고 아니 오히려 바로 그래서 왕을 사회적 독재의 자연스러운 담지자로 보는 경향이 있다”고 했다. 그러한 사회적 독재는 당연히 부르주아 사회의 이기주의에 정반대되는 것이라고 강조했다. 라살은 재차 보통선거 도입을 호소했고 간접세가 노동자들에게 얼마나 불공평한 것인지 역설했으며 “날짜를 특정해 주신다면 두 번째 대담을 위해 다시 각하의 관저에 준비가 되어 있다”고 밝혔다. 이에 대한 답장은 없었다. 라살은 포기하지 않았다. 또 다른 편지에서 그는 다시금 비스마르크에게 보통선거를 간곡히 부탁했고 다시 만나자고 간청했다.방해받지 않는 철저한 논의가 상황의 긴박성을 볼 때 진정 피할 수 없는 요구”라는 것이다. 그리고 3일 후 다시 “독촉하지는 않겠습니다만 외적인 사건들로 인해 상황이 너무나 급박합니다”라고 편지를 보냈다. 그는 비스마르크에게 만남을 더 끌릴만한 것으로 만들기 위해 ‘철저한 효과가 있는 마법의 레시피’를 약속하면서 일요일 저녁에 방문할 것을 예고했다.

 

두 사람은 실제로 1863년 9월 비스마르크의 집무실에서 다시 만났다. 라살은 비스마르크가 자신이 쓴 글에 관한 정보를 얼마나 철저히 모으고 있는지 보고 놀랐다. 심지어 얼마 발간되자마자 당국에 압수당한 베를린의 노동자들에게!An die Arbeiter Berlins!최신호까지 비스마르크 앞에 놓여 있었다. 그러나 의견 교환에 대한 비스마르크의 관심은 오래전에 사라지고 없었다. 이를 눈치챈 라살은 비스마르크를 두려워하기까지 했다. 라살은 더 많은 편지를 써댔고 다시 만나기 위해 항상 새로운 핑계 거리를 만들어냈으며 관청에 힘써 줄 것을 기대하면서 자신의 법적 문제들을 청탁했다. 그러나 비스마르크에게서 돌아오는 대답은 없었다. 노동운동 진영에서는 프로이센 정부 수반과 라살의 ‘연애’를 걱정스럽게 지켜봤다. 빌헬름 리프크네히트Wilhelm Liebknecht가 속지 않도록 조심하라고 경고하자 라살은 대꾸했다. “흥, 나는 비스마르크와는 잘 지내. 게다가 그는 내게 꼼짝 못해!”

 

1863년 11월 말 라살은 베를린의 어느 노동자 집회에서 연설한 후 체포되었다. 죄목은 내란죄였다. 다음 해 3월 12일 재판 변론에서 그는 시민 계층에 대항하기 위해 보수주의자들과의 연대 가능성을 강조했다. 그리고 비스마르크가 보통선거를 도입하기까지 채 1년도 걸리지 않을 거라고 호언장담했다. 라살은 무죄 판결을 받았다. 사실 그와 비스마르크의 교류는 모욕감을 느낀 라살의 편지와 함께 수주 전에 이미 끝나 있었다.

(참고: 헬게 헤세, <두 사람의 역사>, 북캠퍼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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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스마르크 1

 

비스마르크와 라살의 결투 에피소드

결투는 증오나 불화 때문에, 또는 명예회복을 위해 상호간의 동의로 미리 정한 규칙에 따라펼쳐지는 투쟁을 말한다.

철혈재상으로 불리며 독일 통일을 이룬 비스마르크와 그의 반대편에 서서 독일 노동운동을 이끈 라살도 결투를 벌였다.

 

이 두 사람의 결투를 기록한 흥미로운 문건이 2015년에 발견되었다. 이 문건에 따르면 1860년 4월 1일(이 날은 비스마르크의 마흔다섯 번째 생일이었다)에 비스마르크와 라살 사이에 결투가 있었다. 전통적인 결투 방식은 한 발씩 돌아가며 사격하는 것이었는데, 우선권은 결투에 응한 사람이 가졌다. 비스마르크가 먼저 총을 쏘았지만 라살을 맞추지 못했다. 그 다음 차례로 라살이 총을 쏘려 하자 비스마르크는 도망을 갔다. 당시 이런 행위를 하는 사람은 비겁자로 몰려 사회적으로 매장당했다. 라살은 비스마르크의 생일 때마다 비겁자를 뜻하는 ‘때밀이 수건’을 보냈고 이후 라살은 주변 사람들에게 비스마르크가 자신에게 “꼼짝 못한다”고 말하며 비스마르크를 조롱했다.

(https://www1.wdr.de/mediathek/audio/zeitzeichen/audio-duell-zwischen-bismarck-und-lassalle-am-100.html 참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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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리히 캐스트너의 시 3

 

햄릿의 유령

 

구스타프 레너는 분명

토겐부르크 시립극장의 최고 배우였다.

누구나 그의 완벽한 연기를 잘 알고 있었다.

누구나 그가 연기한 영웅적인 아버지 역할에 대해 잘 알고 있었다.

 

심지어 연극계의 전문가들도 그를 칭찬했다.

여자들도 그가 여전히 날씬하다고 생각했다.

오직 한 가지, 유감스럽게도

구스타프 레너는 돈이 있을 때면 폭주하는 버릇이 있었다.

 

<햄릿>이 상연되던 어느 날 저녁,

햄릿 아버지의 유령 역을 맡았던 그가

아, 술에 잔뜩 취한 채 무덤에서 나온 것이다!

그는 술 취한 사람이 할 수 있는 모든 짓을 했다.

 

햄릿은 매우 놀랐다.

유령이 완전히 제 역할에서 벗어난 것이다.

부랴부랴 장면이 축소되었다.

레너는 무슨 영문인지 물었다.

 

스태프들이 그를 무대 뒤로 끌어내

술을 깨게 하려고 시도했다.

그를 눕히고 베개를 대 주었다.

그러자 레너는 잠이 들었다.

 

그가 잠들어 더 이상 방해하지 않았기에

동료들은 제대로 연기하기 시작했다.

그런데 그가 다시 나타났다! 바로 다음 장에서,

그의 역할이 전혀 없는 장에서 말이다!

 

그는 부인인 왕비의 발을 밟았고,

아들 햄릿의 칼을 빼앗아 부러뜨렸다.

그는 오필리아와 블루스를 추었고,

왕을 객석으로 내동댕이쳤다.

 

배우들은 겁에 질려 도망쳤다.

하지만 관객들은 이 소동에도 개의치 않았다.

그렇게 우레와 같은 박수갈채가 터진 건

토겐부르크에서 처음 있는 일이었다.

 

토겐부르크 사람들 대부분이

드디어 <햄릿>을 이해하게 되었다고 생각한 순간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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