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스마르크 2
비스마르크와 라살의 역사
1. 비스마르크
1848년 전후에 보수적인 정치가에 불과하였던 비스마르크는 러시아 주재대사(1859), 프랑스 주재대사(1862)가 되면서 안목을 넓혔고, 1862년 국왕 빌헬름 1세가 군비 확장 문제로 의회와 충돌하던 시기에 프로이센 총리로 임명되었다. 그는 취임 첫 연설에서 “현재의 큰 문제는 언론이나 다수결에 의해서가 아니라 철과 피에 의해서 결정된다”라고 선언하며 이른바 ‘철혈정책’의 의지를 밝혔다.
비스마르크는 그가 사랑하는 세계를 구하려 했다. 라살과 처음 만났을 때도 같은 마음을 가슴에 품고 있었다. 그가 사랑하는 세계란 군대와 귀족과 왕이 지배하는 프로이센의 신분 사회였다. 이는 영지와 사냥과 마차의 세계, 수 세대에 걸쳐 굳어진 높은 신분과 비천한 신분의 세계였다. 철강 콘체른의 굴뚝, 거대한 공장, 철로가 이미 오래전에 숨 막히는 속도로 모든 옛것을 뒤덮었다. 혁명적인 경제 발전으로 확장해 나가는 도시들, 점차 목소리를 높이는 시민계급 그리고 점점 더 자신들의 권리를 주장하기 시작한 노동계급은 비스마르크가 성장해 온 평온한 프로이센을 위협했다. 정치 일선에서 비스마르크가 실제로 맞서 싸워야 할 적은 자유주의자들이었다.
비스마르크는 실패한 1848/49년 혁명의 잔해 위에서 활동했다. 그런 상황에서 프로이센은 조각조각 갈라져 있던 독일의 가장 큰 세력으로 부상했다. 이렇게 갈라진 독일이 어디로 갈 것인지, 통일을 이룬다면 어떤 형태의 국가가 될 것인지를 아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민주적 국가 형태로의 독일 통일은 일단 좌절되었으나 그 이념의 불씨는 살아 있었다. 이념의 수호자로 남은 자유주의자들과 자유주의가 비스마르크는 너무나 역겨웠다. 그에게 자유주의는 시민계급이 쓸데없는 말과 알 수 없는 음모로 권력을 탈취하려는 음흉한 이념에 지나지 않았다. 비스마르크는 자유주의자들이 말하는 자유에서 사회적 기회를 찾을 수 없었고 그저 제멋대로의 자의성만 보았다.
비스마르크에게는 국가와 사회에 대한 분명한 구상이 있었다. 그가 구상한 사회에서는 누구에게나 역할이 있고 그 역할을 저버리면 안 된다. 그러나 자유주의자들은 정태적인 것이 아닌 역동적인 사회를 원했다. 누구에게나 평등한 기회가 주어지고 누구나 말하고 참여할 권리가 있으며 스스로 변화할 수 있는 그런 사회 말이다. 자유주의자들이 추구하는 국가에서 갈등은 찬반 토론을 통한 합의를 거쳐 해결되었다. 자유주의 사회는 무한히 변화 가능한 토대 위에서 자신을 문제 삼도록 의도적으로 구상된 것이었다.
비스마르크는 이를 알지 못했다. 그의 눈에는 자유를 위한 자유주의자들의 변론은 목표가 없어 보였다. 그는 자유주의의 옹호자들을 모두 원칙이 없는 자들로 여겼다. 비스마르크는 자유주의가 매우 분명한 원칙들을 표방하고 있음을 보지 못했다. 자유주의는 공정하게 최선의 이념을 위해 싸우는 사회를 원했다. 그러기 위해 국가는 규칙을 세우고 그것이 지켜지도록 살펴야 한다. 그러나 권력 지향적 인간 비스마르크는 원칙이 없는 사람이었다. 그는 언젠가 이렇게 말했다. “우리가 원칙을 확고히 지키는 것은 원칙이 시험대에 오르지 않는 한에서다. 그런데 그런 일이 일어나면 우리는 원칙을 버린다.”
비스마르크는 마키아벨리의 국가철학 정신 속에서 살았다. 취임 후 한 연설에서 그는 자신의 시각을 분명히 했다. “독일은 프로이센의 자유주의가 아니라 그 힘을 본다. 시대의 커다란 문제는 연설이나 다수결의 원칙을 통해 결정되는 것이 아니라 철과 피로 결정된다. 이를 간과한 것이 1848/49년의 큰 실수였다.” 이 연설은 훗날 일어나게 될 일은 앞당겨 말한 셈이 되었다. 전쟁조차도 목적을 위한 수단이었다.
그 목적, 즉 프로이센 왕국은 비스마르크에게는 모든 수단을 정당화했다. 반면 자유는 그에게 목적이 아니었다. 자유는 국가 질서를 좀먹을 뿐이었다. 자유주의를 혐오하는 비스마르크는 역설적이게도 자신과 대척점에 있는 라살과 뜻을 같이한다. 물론 라살은 비스마르크와는 다른 사회를 원했다. 그러나 국가는 어떤 부동의 건축물이어야 한다는 생각이 두 사람을 하나로 묶었다. 그들의 생각과 같은 국가라면 바꿀 필요도 개조할 필요도 없는 것이었다.
2. 라살
비스마르크보다 열 살 아래인 라살은 이미 오래전부터 서서히 태동하기 시작한 노동운동의 대변자였다. 그는 부유한 유대인 비단 중계상의 아들로 매우 지적이고 열정적이었으며 명예에 집착했다. 짙은 갈색의 헝클어진 머리가 길쭉하고 단호한 얼굴을 사자 갈기처럼 휘감고 있는 듯한 인상의 라살은 고향 브레슬라우Breslau에서 철학을 공부했고 헤겔에 열광하기 시작했다. 일찍이 지식인들 사이에 이름을 알린 그는 당대 거물 중에서도 알아보는 사람이 생길 정도였다. 알렉산더 폰 훔볼트는 라살을 ‘신동’이라고 했고, 파리에서 만난 시인 하인리히 하이네Heinrich Heine는 ‘폭넓은 지식과 최고의 통찰력을 지닌’ 지성인이자 실천가라고 평했다. 그렇지만 하이네는 라살이 매우 이기적이고 수단 방법을 가리지 않는 사람이라는 것도 눈치챘다.
라살은 하이네의 추천서로 베를린 살롱에 들어갈 수 있었다. 여기서 당시 스물한 살이었던 그는 하츠펠트Hatzfeldt 백작 부인을 만난다. 그녀는 불행한 정략결혼에서 벗어나려 변호사를 찾고 있었고 라살이 적임자라고 생각했다. 그는 백작 부인이 사는 뒤셀도르프로 이사해 법학을 공부하기 시작했고 9년의 법적 소송 끝에 그녀의 족쇄를 풀어 주었다. 라살은 감사의 답례로 평생 연금을 보장받았다.
약자들의 변호인이라는 명성을 얻게 된 라살은 약자들의 이해를 위해 싸웠다. 이때부터 그는 지도자를 꿈꿨다. 라살은 1848년 혁명 중에 민중을 무장투장에 선동해 여러 번 체포되었다. 그는 혁명 당시 독일에 남은 몇 안 되는 자도자급 혁명가 중 한 사람이었는데 법정에 소환되어 금고형을 받을 위험도 감수했다.
비스마르크가 베를린에서 부르주아 자유주의자들과 싸움을 시작하는 동안 런던에서는 이미 오래전에 마르크스와 엥겔스가 성장하는 노동자계급에게 도래할 천국을 설파하는 선구적 사상가로 활동하고 있었다. 라살은 그들의 저작을 탐독했고 그들과 만났다. 라살은 그들의 희망에 찬 예언에 만족하지 않았다. 그는 마르크스와 엥겔스가 제시한 세계를 앞당기려 했다. 그는 런던에 두 번 갔지만 마르크스와 의견의 일치를 볼 수 없었다. 함께 혁명을 이룰 수는 없었지만 마르크스는 라살의 이른 죽음을 막은 사람이다. 1858년 주먹질한 상대에게 결투를 신청한 라살을 말린 것이다.
라살은 독자적인 길을 가기로 결심한다. 그것이 그와 어울리는 길이기도 했다. 1862년 4월 중순 베를린 노동자들 앞에서 한 연설에서 라살은 노동자정당의 창당을 요구했다. 그는 군주제와 프로이센은 건드리고 싶지 않았다. 라살이 생각하는 사회주의 사회는 기존의 권력 지형 안으로 편입하는 것이었다. 파업을 거부했고 임금은 의회에서 정하고자 했다. 이상적인 국가에 관한 구상에서 라살은 ‘프롤레타리아트 독재’를 거쳐 탄생하는 완전히 새로운 사회를 꿈꾸었던 마르크스와 엥겔스의 이념과 분명하게 결별했다. 그가 자신의 구상을 피력한 《노동자 강령Arbeiterprogramm》(1862)은 라이프치히 노동자들에게 특히 깊은 인상을 남겨 새롭게 정립할 노동운동의 지도자가 되어 달라는 요청을 받는다. 라살은 1863년 5월 1일에 이 요청에 응답했다. 〈라이프치히에서 전 독일 노동자대회를 개최하는 중앙위원회에 보내는 공개 답변서〉에서 그는 다시 한번 자신의 구상을 밝혔다. 여기에서 그는 보통선거와 평등선거를 위한 투쟁과 국가가 지원하는 생산협동조합의 창설을 주요 목표로 세웠다.
라살의 부상을 주의 깊게 관찰했던 비스마르크는 그를 관저로 초청한다. 비스마르크는 이 초청의 명분을 ‘노동계급의 상황에 대한 자문’을 듣기 위해서라고 했다. 그러나 그건 핑계에 불과했다. 무엇보다도 비스마르크는 자유주의에 대항하기 위해 어떻게 라살을 자신의 편으로 끌어들일 수 있을지 알아보려 했다. 창립 준비 중인 1863년 5월 12일 혹은 13일에 비스마르크와의 첫 만남이 성사되자 라살은 자신이 곧 대중운동의 선봉에 서게 되리라고 확신했다. 그는 비스마르크의 초청에 우쭐해졌고 일종의 대등한 지위를 확보한 것 같아 기분 좋아했다. 그래서 라살은 비스마르크와의 대화에서 최선의 독일 국가에 관한 자신의 구상을 스스럼없이 밝혔다.
라살은 채 두 주도 지나지 않아 라이프치히에서 열린 전 독일 노동자 연맹ADAV(훗날 사민당SPD의 모태가 된 조직) 창립 대회에서 의장으로 선출되자 서둘러 비스마르크에게 강령을 보냈다. 라살은 동봉한 편지에서 농담으로 이 강령을 ‘내 제국의 헌법’이라고 불렀다. 게다가 억지로 꾸민 말로 노동자계급은 “공화주의적인 사상에도 불구하고 아니 오히려 바로 그래서 왕을 사회적 독재의 자연스러운 담지자로 보는 경향이 있다”고 했다. 그러한 사회적 독재는 당연히 ‘부르주아 사회의 이기주의에 정반대’되는 것이라고 강조했다. 라살은 재차 보통선거 도입을 호소했고 간접세가 노동자들에게 얼마나 불공평한 것인지 역설했으며 “날짜를 특정해 주신다면 두 번째 대담을 위해 다시 각하의 관저에 갈 준비가 되어 있다”고 밝혔다. 이에 대한 답장은 없었다. 라살은 포기하지 않았다. 또 다른 편지에서 그는 다시금 비스마르크에게 보통선거를 간곡히 부탁했고 다시 만나자고 간청했다. “방해받지 않는 철저한 논의가 상황의 긴박성을 볼 때 진정 피할 수 없는 요구”라는 것이다. 그리고 3일 후 다시 “독촉하지는 않겠습니다만 외적인 사건들로 인해 상황이 너무나 급박합니다”라고 편지를 보냈다. 그는 비스마르크에게 만남을 더 끌릴만한 것으로 만들기 위해 ‘철저한 효과가 있는 마법의 레시피’를 약속하면서 일요일 저녁에 방문할 것을 예고했다.
두 사람은 실제로 1863년 9월 비스마르크의 집무실에서 다시 만났다. 라살은 비스마르크가 자신이 쓴 글에 관한 정보를 얼마나 철저히 모으고 있는지 보고 놀랐다. 심지어 얼마 전 발간되자마자 당국에 압수당한 《베를린의 노동자들에게!An die Arbeiter Berlins!》의 최신호까지 비스마르크 앞에 놓여 있었다. 그러나 의견 교환에 대한 비스마르크의 관심은 오래전에 사라지고 없었다. 이를 눈치챈 라살은 비스마르크를 두려워하기까지 했다. 라살은 더 많은 편지를 써댔고 다시 만나기 위해 항상 새로운 핑계 거리를 만들어냈으며 관청에 힘써 줄 것을 기대하면서 자신의 법적 문제들을 청탁했다. 그러나 비스마르크에게서 돌아오는 대답은 없었다. 노동운동 진영에서는 프로이센 정부 수반과 라살의 ‘연애’를 걱정스럽게 지켜봤다. 빌헬름 리프크네히트Wilhelm Liebknecht가 속지 않도록 조심하라고 경고하자 라살은 대꾸했다. “흥, 나는 비스마르크와는 잘 지내. 게다가 그는 내게 꼼짝 못해!”
1863년 11월 말 라살은 베를린의 어느 노동자 집회에서 연설한 후 체포되었다. 죄목은 내란죄였다. 다음 해 3월 12일 재판 중 변론에서 그는 시민 계층에 대항하기 위해 보수주의자들과의 연대 가능성을 강조했다. 그리고 비스마르크가 보통선거를 도입하기까지 채 1년도 걸리지 않을 거라고 호언장담했다. 라살은 무죄 판결을 받았다. 사실 그와 비스마르크의 교류는 모욕감을 느낀 라살의 편지와 함께 수주 전에 이미 끝나 있었다.
(참고: 헬게 헤세, <두 사람의 역사>, 북캠퍼스)